통합검색
게시물 (13건)
- 봉산정사 鳳山精舍 엄이재 掩耳齋
- 서구 용두동 산 79번지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깊숙한 꽤 높은 곳 봉황산 가파른 중턱에는 한 지식인이 시대적 아픔에 어쩌지 못하고 읍궁암泣弓菴에서 울분을 삭히며 세상을 마감했던 유서 깊은 흔적이 있다. 광주읍지(1924)에는 주의 서쪽 30리의 거리인 봉황산에 위치해 있다.주변에 큰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봉산
- 봉산사 / 鳳山祠
-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봉황산 구릉지대고광선(高光善)을 배향하는 사우1906년 창건1906년 지역유림과 제자들이 고광선을 기리고자 건립사당 : 정면 3칸, 측면 1칸, 맞배지붕봉산사 묘정비추모제 유허비상의문(솟을대문)엄이재(掩耳齋) : 정면 4칸, 측면 1칸, 팔작지붕향사인물: 고광선(高光善, 1855~1910) 본관-장흥(
- 기동석(奇東奭)
- 기동석(1875~1950)의 본관은 행주이다. 자는 국로(國老)이고 호는 회계(晦溪)이다.부 : 奇琮鉉조 : 奇榮國증조 : 奇象憲외조 : 竹山 安命和처부1 : 長興 高濟喬처부2 : 光山 盧文奎기동석은 작은아버지인 기주현(奇周鉉, 1846~1907)의 양자로 입적됐다. 묘는 광산구 임곡동 노동마을에 있다가 이장하여 촌곡면 종산마을에 있
- 고광선
- 고광선(高光善, 1855~1934)의 본관은 장흥(탐라)이며 장흥고씨(長興高氏)이다. 자는 원여(元汝) 호는 현와(弦窩)이다. 서창면 용두리에 살았다. 1855년(哲宗 6) 光州 復村에서 湖隱 高璞柱와 행주기씨 禹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. 조선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霞川 高雲과 忠烈公 高敬命의 직계후손이다. 어려서부
- 이철수-군수이공철수송덕비
-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(봉산정사)1968년광산군수 이철수의 송덕을 기리는 비이다. 용두동 봉황산 봉산정사 입구 왼편에 있다. 나무덩쿨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.1968년 6월 담양군수, 1969년 5월 나주군수로 이동했다.
- 엄이재중건의연방명비
-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, 봉황산 봉산정사1976년이 엄이재중건의연방명비(掩耳齋重建義捐芳名碑)는
- 서구문화원, 17일 광주지역 문화답사 가져
- 광주 서구문화원(원장 정인서)은 17일 문화원 회원 2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9월중 지역문화답사로 벽진서원과 박호련 묘소, 봉산정사, 용두동고인돌 등을 둘러보고 지역문화와 스토리텔링에 대한 방안 등을 논의했다.이날 첫 방문지는 풍암동 벽진서원으로 이곳에 향사된 회배 박광옥은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, 김천일과 함께
- 고광선-현와고선생묘비명
-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(봉산정사)이 조선유민현와고선생묘비명(朝鮮遺民弦窩高先生墓碑銘)은 현와 고광선 선생의 묘비명이다. 봉산정사 건너편 왼쪽의 산록에 있다.고광선은 광산구 안청동 석음 박노술의 풍천대를 1920년 세울 당시에 도유사를 맡는 등 지역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. 영식재와 만취정의 상량
- 엄이재중건비
-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(봉산정사)중건비는 1976년에 파평인 중헌重軒 윤정복尹丁鍑이 글을 지었고 함평인 이창헌李昌憲이 글씨를 썼다.
- 엄이재유적비
-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(봉산정사)유적비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(1855~1934)의 문하생인 충주인 송애松厓 박하형朴夏炯(1891~1971)이 글을 짓고 후학인 죽산인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(1907~1987)이 글씨를 썼다.
- 봉황산
- 서구 용두동과 남구 압촌동광주 무등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는 수레바위산 - 소룡봉 - 분적산 - 금당산을 지나 화방산 - 송학산 - 봉황산 - 등룡산으로 이어지다가 승촌에서 영산강을 만나 끝을 맺는데 그중에 봉황산은 167.8m이다. 서창과 대촌의 중간에 있으면서 눌재로를 사이에 두고 송학산과 마주보는 산이다.
- 탐진후인최원봉 김해후인김종우 송덕비
-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83-1 봉산정사 입구1968년탐진 최원봉崔元鳳과 김해 김종우金鍾堣의 은덕을 기리는 비로 1968년 4월에 봉학마을 봉산사 입구 못미처서 오른 편에 세워졌다. 뒷면의 송덕시 내용으로 봐서는 봉학마을과 관련한 인물로 평가된다.비의 뒷면에는 정부룡 글과 O효식의 글씨로 된 송덕시가 써있다.황금평야
- 봉산사
-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번지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깊숙한 꽤 높은 곳 봉황산 가파른 중턱에 봉산사가 있었다. 이곳은 을사늑약 이후 어지러운 세상에 그만 ‘귀를 닫아버리고[掩耳]’ 싶었다고 해서 ‘가리다, 숨기다’의 엄(掩)자를 쓴 엄이재 띠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친 현와 고광선이 지낸 곳이다.주변 숲속에 읍궁암
이전
1
다음